이현정(b.1972- Korea)은 지상과 천상, 구름과 계곡 사이의 여정이 되는 시각적 ‘길’을 창조한다. 부감법으로 내려다본 풍경 같은 작품에서 관람자는 작가가 초대하는 시적인 풍경 속으로 내면의 여정을 떠난다. 회화와 금속공예, 그리고 한국에 대한 기억은 작가의 작업세계를 구성하는 세 가지 요소이다. 작가는 한국에서 살 때부터 물질의 재료적인 특성과 선조에 대해 관심을 가져왔다. 어린 시절 학교에서 한지를 물에 풀어 탈을 만들었던 기억은 작가에게 한국적인 것에 대한 친밀한 기억을 남겼다. 한지는 이러한 기억의 외피가 되고, 법랑자기는 그 기억들을 담고 있는 상징이 되어 삶의 흔적과 자취를 남기고 화면 위에 푸른 풍경을 이룬다. 작가는 프랑스로 간 이후, 종이를 물에 풀어 원래의 부드러움을 제거한 뒤 다시 형성하는 과정을 통해 더욱 강렬하고 불규칙적인 질감을 만들어내기 시작했다.

약 2000년 전까지 기원이 거슬러 올라가는 한지는 닥나무 껍질을 이용해 손으로 직접 떠서 만드는 종이이며 제작 특성상 다양한 활용이 가능하고 잘 찢어지지 않는 견고함으로 잘 알려져 있다. 한지 제작은 수많은 작업단계와 세심한 관리가 필요한 작업으로 이현정의 작업 과정에서 영감과 비전을 불어넣는 역할을 한다. 이 과정에서 작가는 종이를 평평하게 만드는 대신에 불규칙하게 도드라지는 표면이 드러나게 한다. 이렇게 이미 만들어진 혹은 사용된 종이를 흩트리고 다시 새로운 바탕을 만드는 과정은 작가로 하여금 스스로의 내면에 길을 내고 풍경을 구성하는 행위이다. 그리고 그 위에 붓으로 선을 그려 종이 자체의 결을 강조하거나 없애서 패턴을 만드는데 정해진 규칙이 아닌 작가 자신의 신체적 움직임으로써 종이 위에 새로운 리듬을 형성한다.

마치 향기를 통해 잊고 있던 순간의 기억을 떠올리는 것처럼, 작가가 한지 위에 그려낸 길은 각자의 내면에 묻혀 있는 기억을 깨워 개인적이고 정신적인 여정을 떠나도록 인도한다. 작품 속 무수한 선들은 우리가 지내왔던, 혹은 지금 지나고 있는 어떤 순간이나 어떤 날이 된다. 또한 울퉁불퉁한 굴곡 위에 새롭게 그려낸 선들은 앞으로 딛고 나아가는 한 발자국이 될 수도 있다. 이처럼 이현정의 작품은 우리가 걸어온 삶의 길이자 가장 개인적인 기록인 동시에 한 폭의 풍경화로서 언제 어딘가에 끝없이 펼쳐져 있을 숲이나 모래언덕 또는 물가의 풍경 그 자체가 되기도 한다.

이현정 작가는 서울 출생으로 세종대학교 서양학과를 졸업했다. 파리에서 금속세공 훈련을 받았으며 현재 파리와 서울을 오가며 활동하고 있다. 2017년 파리 Grand Palais에서 Art Capital Taylor Price를 수상했다. 프랑스 파리 Salon d'Automne, Art Capital, 홍콩 Beyond Borders Art Exhibition, 중국 상하이 International Paper Art Biennale 등에서 단체 전시에 참여하였으며, 스위스 몬트루 Plexus Palace Art Gallery, 프랑스 파리 Fondation Taylor, IDA Médicis Art Gallery, 브뤼셀 Gallerie Sept 등에서 개인전을 가졌다.